著書/美世麗尼(2018)

나루터에서 영화 ‘피아노’를 생각하다.

온달 (Full Moon) 2018. 2. 20. 15:43



나루터에서 영화 ‘피아노’를 생각하다.

 

 

 

한국 최초의 피아노를 들여온 곳이 사문진 나루터다. 미국인 선교사 부부의 피아노였다. 이 피아노는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일본과 부산을 거쳐 낙동강 짐배에 실려 이곳을 통해 들어오게 된다. 1900년 3월 26일의 일이다. 당시 사문진 나루터는 낙동강 물류의 최대 중심지였다. 사문진 나루터에 내려진 피아노는 육로로 선교사 부부가 사는 대구 약전 골목까지 운반되었다. 열악했던 해상과 육상 운송수단을 고려할 때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피아노가 작고 가벼운 물건이었다면 아마도 사문진 나루터의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대리석으로 정교히 다듬은 돌 피아노 한 대가 나루터 중앙에 기념비로 놓여 있다.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들겨 보았다. 물론 돌에서 피아노 소리가 날 리가 없다. 그러나 피아노를 그토록 좋아했을, 마음이 음악처럼 고왔을 선교사 부부의 따뜻한 마음이 내 손끝에 전해 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루터에는 2012년부터 매년 100대 피아노 콘서트가 열리고 있어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올해로 6회째 맞이한다. 가벼운 바이올린이나 색소폰이라도 놀랄 만큼의 숫자다. 100대의 피아노가 차량에서 내려지는 것을 상상해 보아도 이것은 감히 엄두가 나지 않을 이벤트다.

 

오래전 감명 깊게 보았단 영화 ‘피아노’가 문득 생각났다. 여성감독 제인 캠피온Jane Campion의 ‘피아노Piano’라는 영화다. 영화 속 시대적 배경도 19세기 말이니 조선 시대 사문진 나루터에 도착한 피아노와 동시대였을 것이다. 피아노는 절대 가벼운 물건이 아니어서 지금도 이삿짐 중에서 언제나 난감하게 여기는 물건이지 않는가. 이런 어려움 때문에 영화 속 여주인공 ‘에이다Ada’는 파란만장한 인생길을 걸어야 했다. 피아노만 에이다가 원하는 곳에 순탄하게 옮겨다 놓을 수 있었더라도 한 여자의 일생 또한 순탄하였을 것을.

 

에이다는 20대의 영국 미혼모다. 여섯 살 때부터 말하기를 그만두고 침묵을 선택한 그녀를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피아노였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 ‘스튜어트Stewart’와 결혼하기 위해 뉴질랜드에 도착한다. 그러나 선원들은 그녀와 피아노를 해변에 내려놓고 가버린다. 그녀를 맞이했던 결혼 상대자 스튜어트 역시 물건이 무겁고 부피가 커서 도저히 집에까지 가져갈 수도 없고 가져간다 하더라도 집안이 좁아 놓을 자리가 없다며 포기를 강요한다. 그녀의 유일한 꿈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 시기에 스튜어트의 친구 ‘베인스 Baines’가 제안을 한다. 스튜어트가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땅과 해변에 방치한 에이다의 피아노와 맞바꾸자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은 에이다가 피아노 개인교습을 자기 집에서 해 달라는 것이다. 계약은 성사되었다. 베인스와 에이다는 피아노 레슨을 매개로 자주 만나게 된다. 남녀의 일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시간이 갈수록 정이 깊어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 스튜어트는 흥분한 나머지 에이다의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결별을 선언한다. 결국 베인스와 에이다는 피아노를 싣고 뉴질랜드에서 영국으로 쫓겨나게 된다. 영화의 절정은 에이다가 문제의 피아노를 바다에 버리기를 결심하고 에이다 자신도 피아노에 몸을 묶어 함께 죽음을 택하는 데 있다. 다행히 물속에서 에이다는 마음을 바꾸고 간신히 탈출하나 피아노는 영영 바닷속으로 수장된다.

 

영화는 에이다와 베인스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녀의 마지막 독백이 압권이다.

 

밤에는

바다 무덤 속의 내 피아노를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은 그 위에 떠 있는 나 자신도.

그 아래는 모든 게 너무도 고요하고 조용해서

나를 잠으로 이끈다.

그것은 기묘한 자장가이다.

그리고 나의 자장가이다.

소리 한 점 없는 고요함이 있다.

소리가 존재할 수 없는 고요가 있다.

깊고 깊은 바다 차가운 무덤 속에.

 

위 인용한 구절은 에이다가 바닷속에 남겨놓은 자신의 피아노를 그리워하는 대목이다. 에이다는 자신의 운명이 마치 버려진 피아노와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소리가 있을 수 없는 피아노지만 그녀에게는 기묘한 자장가가 되어주고 있다. 소리 한 점 없는 고요와 소리가 존재할 수 없는 고요함이라는 표현이 깊은 감명으로 남는다. 이는 토마스 후드Thomas Hood의 ‘고요Silence’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기도 하다. 조용한 배경음악 아래 에이다의 독백이 흐르면서 영화는 침묵으로 막을 내린다. 서툰 번역이지만 시의 원문을 참고 자료로 첨부하였다.

 

     

* 참고 자료

 

고 요 / By Thomas Hood

 

소리 한 점 없는 고요함이 있다

소리가 존재할 수 없는 고요가 있다

깊고 깊은 차가운 바닷속 같은 고요

 

혹은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없는

고요에 줄곧 길든

깊은 잠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할,

사막 같은 고요가 있다:

무음도 오히려 소란스럽고,

한적함도 되레 번거로운 곳

오직 구름과 그 그림자만이

자유롭게 떠다니는 곳

놀리는 땅을 탓하는 이도 없는 이곳에;

 

허나, 초목이 우거진 폐허,

누군가 살았을 고택의 허물어진 벽들,

회색여우, 하이에나가 울음 울고,

부엉이는 낮은 울음 울며

화답 보내며 날아다니는 곳

이곳에도 고요는 있다.

 

진정한 고요는,

자의식과  혼자 머무름에 있다.

 

 

 

Silence / By Thomas Hood

 

There is a silence where hath been no sound, There is a silence

where no sound may be,

In the cold grave—under the deep

deep sea,

 

Or in the wide desert where no life is found, Which hath been mute, and still must sleep profound;

No voice is hush’d—no life treads silently, But clouds and cloudy shadows wander free, That never spoke, over the idle ground:

 

 

 

But in green ruins, in the desolate walls Of antique palaces, where Man hath been, Though the dun fox, or wild hyena, calls, And owls, that flit continually between, Shriek to the echo, and the low winds moan,

 

 

There the true Silence is, self-conscious and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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