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美世麗尼(2018)

푸어 하우스(Poor, House)

온달 (Full Moon) 2018. 2. 21. 09:51




푸어 하우스(Poor, House)

 

푸어 하우스, 불쌍한 내 집. 사철 커튼은 내려져 있고, 해가 지면 불이 꺼진 외로운 비행접시가 되어 공중에 표류하는 공간이다. 홀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네 마음이 어떠하며, 거처 없이 전전긍긍하는 내 마음인들 온전하겠느냐. 지금쯤은 너나 나나 지칠 때도 되었다 싶구나. 더워도, 추워도, 바람이 불어도 비가 쏟아져도 잠시라도 너를 잊고 지낼 수 없었다. 돌아갈 곳이라야 오직 너의 품인 것을 내가 왜 모르랴.

 

두 살 터울의 딸아이 셋을 이 년 차로 차례로 시집을 보냈다. 손자들이 해마다 생겨나 합이 넷이다. 첫 손자가 일곱 살이고, 막내딸의 둘째가 두 살배기다. 외손의 출생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할아버지 할머니 반열에 올려놓았고, 내외는 기꺼이 위대한 가계 잇기 사업에 발을 담갔다. 자녀들의 육아 도우미를 자원하여 여럿 딸 집을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일곱 해가 되었고, 살던 집은 말뚝 하나 꽂아 놓은 양 덩그러니 홀로 비워놓고 있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돈이 남아돌아 비워둘 집도 가지고 있나 하겠지.

 

그럴 양이면 아예 자식들과 살림을 합치라고 한다. 말처럼 결심이 쉽지가 않다. 손자 보기는 임시 임무이고, 애들이 초등학교의 고개만 넘어서면 우리는 다시 일상의 노후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더욱이나 서울의 집값이 다락같이 높아서, 지방 것은 처분하고 올라가더라도 전세금에도 못 미친다. 집 없이 뜨내기로 사는 것하고, 제집이 있다는 것하고는 마음의 위로가 다를 것이다. 어쩌면 요즈음 유행하는 ‘하우스 푸어’의 연장선에 내 ‘푸어 하우스’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관리 능력도 없으면서 끝까지 끌어 쥐고 있겠다는 고집, 그리고 놓치면 죽는다는 집에 대한 애착은 양쪽이 같으며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 또한 똑같다. 단지 ‘하우스 푸어’는 통 큰 살림의 소치이지만, ‘푸어 하우스’는 우물쭈물하는 동안 대책이 없이 시간이 가버린 우유부단의 산물이다.

 

이웃은 밤이면 불이 켜지고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겨울이면 난방이 되어 온기를 더하고 여름이면 에어컨이 돌아가 땀을 식히고 있을 것이다. 주말이면 유리창을 닦고 애정이 묻어나는 잔손질로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주인 없이 남겨진 ‘불쌍한 집’은 거의 생존 차원이다. 보일러는 동파되지 않을 정도의 ‘외출’ 기능으로 세팅되어있고, 여름에는 도둑 등쌀에 아무리 더워도 닫아 놓아야 하는 밀폐공간이다. 가물에 콩 나듯 들러 방문 한번 열어 보거나, 우편물을 거둬 가는 정도가 고작 주인의 관리능력이다. 이런 사정이라면 차라리 새 주인을 맞았으면 좋겠다 싶지 않을까?

 

올여름 ‘Poor House’가 처음으로 반기를 들었다. 주인을 혼쭐 내 주려고 작심이나 한 듯 큰일 쳤다. 달포 만에 집에 들러 방문을 여니 악취가 진동했다. 마치도 무덤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전기는 불통이 되었고 냉장고는 멈춰 섰다. 냉동실에 보관해 두었던 것들이 모두 썩어 있었다. 언제부터 부패가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냄새가 벽지에까지 찌들어 있는 걸로 보아 보름은 넘었을 것 같았다. 짐작하건대 유난히 무더웠던 삼복더위에 냉장고에서 먼저 탈이 나고, 그 결과 전기 과부하가 걸렸던 모양이다. 다행히 두꺼비집 차단기가 자동으로 내려와 있어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니, 불이 나지 않은 것만으로 크게 나를 봐준 것이다. 악재는 늘 엎친 데 덮친다고 했다. 부패한 것들을 쓸어내고 있는 사이 보일러에서 수돗물이 터졌다. 수돗물 울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참았던 울분을 쏟아 놓는 것 같았다. 관리 사무소 직원이 황급히 달려와 계량기를 잠그고 응급조치를 했고 저녁나절 보일러공의 손길이 닿아서야 상황이 종료되었다. 하루만 늦게 찾아왔어도 아래층들은 물난리를 맞았을 것이다.

 

모처럼 이박 삼일을 이곳에서 지냈다. 외로웠을 ‘푸어 하우스’에게 최소한의 애정을 주기 위해서다. 내 등의 체온이 방바닥을 덥혔다. 다시 일어나지 않을 사람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불쌍한 집과 가난한 주인의 해후가 이루어진 셈이다. 사람이 거처 하는 집보다, 덩그러니 비워둔 집이 더 빨리 노화된다고 한다. 독거노인처럼 집도 외로움을 타서 그럴까? 불쌍한 내 집, 일곱 해 만에 이렇게 노쇠해 버리다니. 집은 긴 시간 잘도 참아 주었건만, 그러나 아직도 주인의 갈 길은 멀다. 두 살배기가 학교 문턱을 밟을 수 있을 때까지는 방랑 생활이 연장되어야 할 것 같다. 이 일은 길어야 앞으로 5년일 거라고 귀띔해 준다. 추석이 가까워지면 으레 태풍 한두 차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창문을 걸어 잠근다. 이번에는 전기를 차단하고 수도 계량기를 잠그는 절차가 더해졌다. ‘불쌍한 집’에게 신신당부했다.

 

“똥집이라 좋다, 부디 탈 없이 버텨만 다오.”





 


'著書 > 美世麗尼(2018)' 카테고리의 다른 글

 美世麗尼 miscellany Ⅰ  (0) 2018.02.21
신분 세탁기가 된 아파트  (0) 2018.02.21
마음 약해서  (0) 2018.02.21
왕王이 아니라 졸卒이 되었다  (0) 2018.02.21
지금 즐기고 바로 행복하라  (0) 2018.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