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王이 아니라 졸卒이 되었다
토요일 사온 오렌지에 이상이 있었다. 겉은 멀쩡한 것이 속은 상해 있었다. 난전 물건도 아닌 대형 마트에 이런 물건을 팔고 있다니. 설상가상으로 이번 일요일은 한 달에 두 번 쉬는 휴장이다. 제 놀 것 다 놀고, 문을 열다니. 내부에는 직원들이 들락날락하는 것이 밖에서 보이지만 소위 왕이라 불리는 사람은 한참이나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오전 10시부터 영업이란다.
냉큼 문 열 생각을 하지 않다니. 왕은 검정 비닐봉투에 상한 오렌지 하나를 들고 있다. 가격으로 치면 그들에게는 천 원이 조금 넘는 물건이지만 왕에게는 매장 전부보다 더 귀하다. 혹시라도 아침 일찍 찾아온 재수 없는 고객이라는 눈치를 준다면 왕은 거세게 퍼부어댈 시나리오를 가지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고객센터 접수순서는 당연히 내가 1번이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검정비닐 봉지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집에서 빨간 색연필로 밑줄을 쳐 놓은 영수증을 같이 올려놓는다. 직원은 환불을 원하는 것이냐고 물어왔지만 오렌지 한 개를 어떻게 환불을 하겠는가. 마뜩찮아 대뜸 동문서답으로 응대를 했다. 매장 품질이 이 모양이 되서야 어찌 마음 놓고 사먹겠느냐며 불만을 쏟았다.
늘 싱싱한 과일을 팔지만 때론 한 두개 하자가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단다. ‘고객은 왕’이다는 구호아래 썩은 과일을 팔아놓고 변명늘어 놓지 말라며 고약한 표정을 지었다. 대형 마트라면 얼른 죄송하다는 사과부터 앞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나 어제가 일요일이니 월요일까지 하루 동안을 기다렸을 손님의 불편은 아랑곳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갑'이 하는 일이 심한 것을 '갑질'이라 한다. 이럴 때는 마트가 갑질이 될까? 아니면 고객은 왕이랍시고 이른 아침 얼굴 붉히는 소비자가 갑이 될까? 비록 과일 하나에 불과하더라도 고객센터에 들고 올 정도면 그 수고도 인정받고 싶고, 왕의 아침 기분도 생각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기껏 환불 여부나 묻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아침 운동복 차림이어서 손님을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지만 오렌지 하나로 법원일 보듯 정장을 차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애초에 환불은 생각이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매장 담당자가 오렌지 두개를 가지고 나왔다. 좋은 것을 하나 골라 가라고 했다. 하나를 골라서 가져가라기보다는 손님의 기분을 위로하는 뜻에서 둘을 내밀어 보이는 것이 장사꾼이 하는 신의 한 수가 아닐까. 공짜를 바라서가 아니다. 나는 하나를 골라잡았다.
바꿔준 오렌지는 싱싱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두고 나는 왜 불량품을 골랐을까? 자신에 대한 원망을 하면서 걸었다. 과일 고르는 안목이 그것 밖에 되지 않았나 싶었다. 몇 개 되지도 않는데 썩을 것을 골랐을 리가 만무하다. 이건 아무래도 이상해. 그럴 리가 없어. 불현듯 생각이 집히는데 있어 그만 길에서 우두커니 서고 말았다. 앗, 세상에 이런 일이? 그렇게 기세가 등등하던 왕이 고개를 숙이는 순간이다.
이 일을 어쩌나! 과일 바구니에 지난주 사 온 오렌지 몇 개가 그때까지 남아 있었던 것을 본 걸 기억해냈던 것이다. 토요일 사 온 것을 그 위에 같이 쏟아부었으니 분명 상한 놈은 전에 것이었을 것이리라. 맞아 마트는 잘못이 없어. 상한 것은 남아있었던 놈일 확률이 더 높아. 허탈에 빠졌다. 내 쪽 잘못은 아랑곳없이 남의 탓으로만 돌리다니.
나 같은 고객은 ‘왕’도 아니고, '갑'도 아니야. ‘졸’이야 졸. 내가 따졌던 모양새는 갑질이 아니라 꼴 갑질어었어. 점원에게 되돌아가 잘못을 알려주고 사과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오히려 점원이 너그러웠다. 그에게서 왕의 모습이 보였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더니 너무 자신을 믿은 내가 부끄러워라, 이 일을 어쩌나? 오렌지를 다시 계산대에 올려놓고는 얼른 잰 걸음을 놓았다. 완전한 졸의 모습으로 꼬리를 내려야했다.
'著書 > 美世麗尼(2018)'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푸어 하우스(Poor, House) (0) | 2018.02.21 |
---|---|
마음 약해서 (0) | 2018.02.21 |
지금 즐기고 바로 행복하라 (0) | 2018.02.21 |
추태 1위가 ‘시끄러움’이라니 (0) | 2018.02.21 |
아주머니 시비 (0) | 2018.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