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꽃보다개(2013)

촌티를 못 벗으며

온달 (Full Moon) 2018. 5. 15. 09:26

촌티를 못 벗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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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은 내 뿌리가 닿아 있는 곳이다. 지금은 광역시에 속하지만, 아직도 괄호 속에는 달성군 옥포면이라는 주석이 따라다닌다. 면 소재지에서 다시 자갈길 십 리를 더 걸어 들어가야 했다. 촌놈이라는 애칭을 떨칠 수가 없다. 띄엄띄엄 흩어진 마을을 다 주워 모아도 지금 사는 2,500세대의 아파트 단지 하나만 못하다. 내 뿌리는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 박혀있어 조금만 방심해도 촌놈 기질이 튀어나온다. 배가 불러야 안정감을 찾는 신체구조가 그렇고, 싱겁고 얼빠지고 목소리 큰 머슴 기질이 그러하다. 나는 면 단위 출신의 순정품 촌놈이다.

 

綿,

 

면바지 저고리에 두둑이 솜을 넣은 것을 핫바지라 했다. 한 벌로 겨울을 났다. 섶이 구두약을 바른 듯 반질반질해질 때까지 입어야 했던 핫바지 소년이었다. 여러 벌로 씻고 벗고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사정이 되지 않아 삼동에 홑옷으로 지내던 아이에게 비하면 솜바지 하나로도 부유층 자제 같은 부러움을 샀다. 정월 초하루 걸치면 대동강물이 풀려야 그 옷을 벗는다. 옷 한 번 갈아입히려면 얼마나 많은 어머니의 수고를 빌어야 했던가. 핫바지의 따스함은 어머니의 손길 때문에 더욱 따뜻했다. 물빨래로 솜바지가 마르는 시간은 얼었다 풀렸다 열흘도 부족했다. 캐시밀론이 주를 이루는 지금이야 이불이란 것이 큰 보자기 하나만큼이나 흔해졌지만, 당시 솜이불은 시집· 장가갈 때나 장만하던 귀금속에 버금가는 혼수품이 아니었던가. ‘목화밭’ 노래가 사라지고 지금의 아이들은 목화밭의 달콤하고 쌉쌀했던 다래 서리 맛을 모르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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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좋아하던 음식이 국수였다. 등급을 매기면 손수 만들어 주신 어머니의 칼국수가 제일이고, 그다음은 누런 기계 국수다. 백설같이 하얀 놈은 장터에서나 사 먹을 수 있었다. 국수는 보리밥 다음이다. 보리밥도 마음 놓고 먹을 형편이 못되면 밀가루 음식이다. 운명적으로 국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되어버렸다.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가고 나면 살평상에 걸터앉아 갓 삶아낸 쫄깃한 누런 국수를 먹던 풍경은 그야말로 시골 사는 맛을 나게 했다. 정미소에서 밀을 빻는 날 그 밀가루로 즉시 국수를 뺀다. 모양은 나지 않았지만 든든한 한 해 양식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날 때 어머니는 국수파티를 열어 주셨다. 양푼에 철철 넘치게 말아 올린 어머니 표 국수, 참기름 한 방울이면 맛내기 마무리다. 지금은 맵시 있는 도시 색시처럼 가늘고 하얀 소면이 국수의 대명사여서 투박하고 굵고 누런 촌 국수는 천지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국수를 먹으면 명이 길어진다는데, 지금 성한 이 몸은 그때의 면발이 효력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體面〕,

 

체면體面 치레는 촌에서 배웠다. 서당에서 한글 이전에 배운 동몽선습童蒙先習, 계몽편啓蒙篇 덕분이다. 넉넉잖은 집안의 손 많은 가정이라 눈치도 빨랐고 남과의 설정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일찍부터 배웠다. 어떻게 보면 소심하고, 앞에 나서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는 꼴이나 세상살이에 어수룩해 보이는 것도 체면치레를 앞세우는 촌놈 기질에서 나온 것이리라. 시골 사람들은 아직도 염치가 있다. 어른에게 인사할 줄 알고, 뉘 집 자식 못 쓰겠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조심을 한다. 사나흘이 멀다 하고 들어오고 나가는 통에 이웃을 모르고 사는 아파트 생활하고는 딴판이다.

 

면 〔if〕,

 

다시 태어난다면? 문법에서 가정법 미래의 조건절은 현재 또는 미래에 대하여 있을 것 같지 않은 가정이다. 사랑하는 메기Maggie의 추억과 옛날의 금잔디가 아니어도 좋다. 부모 형제가 기다리는 머나먼 스와니 강Swanee River의 그리움이 아니어도 좋다.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용복 가수가 노래한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는 어린 시절의 그곳을 택할 것이다. 깡 촌에서, 핫바지를 입고, 국수를 기호식품으로 아는 순정품 촌놈으로 자라날 것이다. 그리하여 염치와 체면을 아는 도시 아저씨가 되어갈 것이다. 무식하게 도전하고 때론 상처도 받으며 울며불며 아옹다옹 살아갈 것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금처럼 한 생이 다시 흘러가도록 할 것이다. 한번 묻어버린 촌 때는 죽어도 벗지 못하는 무서운 근성이기에 언제나 촌놈이기를 마다치 않을 것이다. 면면히 대를 이어 촌티 나는 가정을 꾸려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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