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온달(2008)

표정관리

온달 (Full Moon) 2015. 4. 13. 14:59

표정관리

 

석현수

 

 

알면 안다고 촐싹대고 모르면 모른다고 불안한 기색이 여실하면 단순한 유형의 사람이다. 이렇게 쉽게 자기를 노출하는 사람은 곧 한수 접어주고 두는 바둑처럼 수월하고 손쉬운 상대이다. 이에 반하여 알아도 모르는 듯, 몰라도 아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있는 사람을 상대하기는 여간 힘들지 않다. 그들은 들어나는 표정도 없고, 감정도 극도로 추슬러 상대의 진의(眞意) 파악은 도무지 한 밤중이다. 흔히 이야기 하는 나무로 깎아 만든 닭 같은 사람이다.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통제할 줄 알고, 무언가 범접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목계지덕(木鷄之德)이 있다고 한다. 모 재벌 회장이 후손에게 자주 들려주었다는 목계(木鷄)이야기는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달생편(達生篇)에 나오며 열자(列子)의 이야기로 소개되고 있다. 주나라에 싸움닭을 훈련하는 사람이 있었다. 왕의 특별한 부탁을 받고 싸움닭을 조련하고 있었다.

열흘이 지나자 왕은 싸움 할 만큼 훈련이 되었는지를 묻는다.

“아직 멀었습니다. 닭이 강하긴 하나 교만하여 자기가 최고인줄 알고 있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난 후 왕은 같은 물음을 한다.

“아직 멀었습니다. 교만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의 소리나 그림자에도 너무 쉽게 반응합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자 또 왕이 묻는다.

“아직 멀었습니다. 닭이 조급함을 버렸으나 상대방을 노려보는 눈초리가 너무 공격적입니다. 그 눈초리를 버려야 합니다.”

그 뒤 열흘이 지난 후 왕이 묻자 그제서야 이렇게 대답한다.

“이제 됐습니다. 다른 닭이 소리를 쳐도 꿈쩍할 낌새도 보이지 않습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깎아 만든 나무 닭 같습니다(望之似木鷄矣). 다른 닭이 모두 싸우려 하지 않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무용을 보이지 않는 불무(不武), 성내지 않는 불노(不怒), 대적하지 않는 불여(不與), 자기 낮춤(爲之下) 여기서 나오는 깎아 만든 닭 같은 표정관리 이것이 후일 세계를 재패하고 있는 한국 명문 ‘S' 재벌가의 대물림 교육이었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수련이 된 닭의 표정을 하고 살고 있을까? 쉽게 노하고 설치며 난체하며 남의 우위에 서기 위해 볏을 고추 세우는 등 채 열흘도 조련이 안된 함량 미달의 싸움닭 수준에 있지나 않는지 스스로 살펴볼 일이다.  

 

검도도장(劍道道場)에 대련(對鍊)하는 모습을 넋을 놓고 구경을 하는 걸인이 있었다. 이는 필히 과거 펄펄 날던 검객이었거나, 아니면 검술을 처음 봐서 신기하여 넋을 놓거나 둘 중에 하나였으리라. 행색은 초라하고 볼품이 없으나 구경하는 모습이 실로 진지하였다. 대원들이 훈련을 마치고 자리를 정리할 때 쯤 이윽고 도장(道場)안으로 들어와 본인도 한번 해 보면 않되겠느냐는 청(請)을 하는 것이었다. 누가 이런 걸인을 상대로 다시 도복을 입고 맞서 줄 사람이 있을까? 사정이 이러하니 불청객을 맞아 검(劍)을 잡은 사람은 바로 대검객(大劍客)이었던 도장 사범이었다.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쥐고 상대를 응시하는 사범의 눈은 금시라도 이 사람의 목을 벨 기세다. 그러나 이 과객(過客)은 지게 작대기 잡듯 칼을 늘어뜨리고는 무표정으로 앞을 보고 서 있는 것이다. 상대의 칼이 자기의 목숨을 흥정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참으로 천연덕스런 모습이었다. 검술이란 원래 상대방에게 나의 허(虛)를 뵈주어 유인하고, 내 허를 향해 들어오는 상대방의 중심이 흔들리는 찰나를 포착하여 공격자의 허를 베어 내는 무술이다. 너무나 무표정한 걸인의 대련(對鍊) 자세가 고수(高手)인 검도 사범(師範)에게는 허술함이 허술함 같지 않았고 마치도 허를 내 보이며 본인을 유인하는 것 같아 결국 사범은 그에게 압도당하여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앞으로 스승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정말 걸인은 고수의 칼잽이 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걸인이었을까? 아마도 후자 이어야 이야기가 더 재미 있어 질 것이다. 위협하는 눈초리를 보이지 않기에 그 마음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게 만든다. 부드러움과 유약함이 결국 강하고 센 것을 이긴다 (柔弱勝强剛). 좋아도 좋은 기색이 없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속내를 쉽게 들어 내지 않는 표정관리. 이것은 공인된 처세술 또는 변장술(變裝術)이다. 교만과 조급함, 그리고 공격적인 눈초리를 버리고 완전한 평정을 찾은 제대로의 표정관리를 하기 까지는 스스로 많은 내공을 키워야 함은 두말 할 여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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