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룡地龍이
석현수
나는 벌거벗은 몸이다. 땅이나 파먹고 사는 바닥인생을 자처하며 목숨을 내놓고 산다. 비가 오면 비를 맞으러 밖을 나서고 빛이 들면 구덩이로 굴러들어 난세에는 가만히 엎디어 지낸다. 나는 무골호인이며 안으로 삭이는 능력이 탁월해 남들에게 여간해서는 나의 속내를 드러내 놓지 않는다. 지룡地龍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은 이 몸의 보잘것없는 자존심에 대한 측은한 칭송이다. 나는 흙 속의 용이면서도 또한 성 프란시스코를 꿈꾼다.
나들이는 꼭 궂은 날에 한다. 우산은 번거롭다. 몸을 간질이는 보슬비는 아무리 맞아도 지치지 않으리라. 비는 나의 외형을 젖게 할 뿐 마음까지 젖게 하지는 못 할 것임을 알기에 오히려 감로수로 즐기는 쪽이다. 목적지 없이 그냥 나선다. 그러니 어찌 걸음인들 잽싸질 수 있겠는가. 챙길 것 없고 딸린 식구도 없으니 얼마나 가볍고 매끄러운 신사의 모습인가. 욕심이 없어 눈여겨 쳐다보아야 할 것도 없고, 차림이 없어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늘 아래만 내려다보고 사는 삶이다 보니 자연히 머리 무게가 아래로 실려 오늘날은 숫제 고개를 들지 않는 겸손 형이 되어버렸다. 가진 것이라고는 시간뿐이라며 웃고 있지만, 글쎄 그것이 어찌 온전한 내 것일 수 있으랴.
용龍이지만 외모에서 위풍당당한 맛도 없고 속에마저 욱일승천의 기세도 없어 숙맥이지만, 그래도 지룡이라 불러주니 고맙다. 몸에 둘린 붉고 흰 완장 흔적들이 마치도 훈장 같다는 생각에서 어쩌면 내게서 용의 흔적을 찾았을지 모르겠다.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덩그렇게 올려 부른 별호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런 칭송에는 크게 마음을 두지 않는다. 자랑할 마음도 없지만, 애써 완장을 감추려는 것도 이젠 이력이 난다.
나는 온몸으로 살아간다.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설령 사통팔달四通八達로 환하게 뚫린 길이라도 절대로 달음박질은 하지 않는다. 능력의 한계를 스스로 알기 때문에 자벌레처럼 재고 또 재다 하루해가 저물 것이다. 먹는 것이 육식도 초식도 아닌 토성土性이기에 먹고 먹히는 사악한 먹이사슬에서도 제외된 선한 얼굴이어서 다행이다. 다만 허울만 빌려 쓴 용이기에 화려한 하늘의 것하고는 거리를 두고 산다.
가다 말다 기력이 다하면 미련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설 것이다.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는 것은 내 사전에 없다. 달팽이나 개미의 더듬이도 없는 몸이기에 길눈이 어두운 길치다. 멈추는 곳이 곧 내가 찾던 지점이 될 것이며, 아울러 그곳이 다음 나들이를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하늘 아래 발 닿는 곳이 전부 내 집이니 무엇을 걱정하랴. 가는 길이 곧 ‘My way'다. 우랄 알타이 퉁구스Ural Altai Tungus 유목민의 피가 내게 흐르고 있는 것일까.
비가 갠다. 눅눅한 여세를 몰아 좀 더 전진해 보고 싶지만 여기서 멈춰야 한다. 흙덩이가 곧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지만 내 이동능력에 비한다면 보도블록은 너무나 높은 만리장성이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욱 빈번해진다. 날이 개고 볕이 사나우니 미동조차도 못 할 만큼 목이 타 온다. 드디어 통곡의 벽 앞에서 순교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질 때 단 한 번 꿈틀하며 보잘것없는 것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켜낸다. 이제 내가 바라던 것은 모두 이루어졌다.
노제路祭를 준비하는 모양이다. 어느 상조회 소속인지 몰라도 잘록한 허리에 까만 복장을 한 것들의 걸음들이 분주하다. 지렁이는 한약에서 지룡地龍이라 부른다는 사회자의 멘트가 나가자 조문객들이 앞 다투어 행사장 앞으로 우르르 쏠린다. 삽시간에 대단한 먹이사슬이 이어진다. 용의 육肉 보시布施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땅의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의식儀式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에세이 포레》(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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