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말을타고(2012)

우린 아니야!

온달 (Full Moon) 2015. 4. 16. 08:30

우린 아니야! 

 

석현수 

 

 

아내는 한참이나 끙끙거리다가 “아~” 하는 비명을 질렀다. 당황한 나머지 얼른 아내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라 잠자리에서 새어나가는 여자의 신음 소리는 누가 들어도 갑남을녀甲男乙女의 허튼 일이라 여길 테니 남세스런 오해에서 벗어나기 위한 궁여지책窮餘之策이었다.

아파트 일 층에 산다. 창문 너머에는 밤중에도 주민 왕래가 잦아 신작로 같은 분위기다. 비록 방을 따로 쓰긴 하지만 딸 내외와 손자와 더불어 좁은 평수에서 생활하고 있다. 환경이 열악할수록 부부간 정이 더 난다지만, 요즈음같이 문을 열고 자야 하는 여름날에는 코골이도, 잠꼬대까지도 조심해 할 일이다.

황소 같던 아내도 이순을 넘고 있으니 육체노동이 만만하지 않나 보다. 집 안 청소며 빨래며 의식주 해결이 오직 한 사람 손에 매달리고 있으니 가사 도우미에 못지않은 중노동이라며 투정이 늘어가고 있다. 손자나 할아버지나 어질러 놓기 선수들이니 혼자서 감당하기가 몹시 어려웠을 것이다.

미련스러울 만치 자기표현이 없는 사람이 죽는 시늉이라니 얼마나 아팠으면 그 소리가 파상의 사이렌 소리 같았을까. 나는 소리의 근원을 차단해야지, 하는 것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창밖에 매달려 있을지도 모를 밝은 귀들이 무서워서다.  

 

서머셋 몸Somerset Maugham의 단편 ‘비Rain'의 마지막 부분에 남자들이란 하나같이 지저분하고 더럽고 돼먹지 못한 돼지 같은 것들이라고 했다. "You men! You filthy, and dirty pigs! You're all the same, all of you Pigs!"

설마 순한 아내가 이런 욕이야 했을까마는, 짐작건대 섭섭함은 도를 넘었을 것이다. 사내란 아무리 점잔을 빼고 있어도 머릿속은 늘 추한 구석이 있어 다급하면 돼지 근성이 먼저 나타나는 법이다.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났단다. 근육이 뭉쳐 뒤틀린 일이니 사정없이 뒹굴었다. “당신 괜찮아?”라는 한마디 위로의 말도 없이 입부터 먼저 틀어막아 버리다니. “야옹~ 야옹~” 고양이 소리를 내어 쥐 쫓는 애교라도 떨거나, 아니면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마사지를 앞세웠다면 나도 남들처럼 평년작 정도의 우수한 남정네가 되었을 텐데. 응급처치라는 것이 고작 상대방 숨통을 조르는 일이 되었으니 쉽게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지른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결벽증이 생사람을 잡았다.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고만고만할 것이라지만, 우리만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며 선을 그어 보이려다 그만 무리수를 둔 것이다.

세인의 눈과 귀가 머물러 있을 아파트 일층 문간방은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 부부는 어항 속 물고기가 되어 투명하게 잠들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대구 여름문학 축제 기고》(2011.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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