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말을타고(2012)

무섭다고 그리오

온달 (Full Moon) 2015. 4. 16. 08:40

무섭다고 그리오 

 

석현수 

 

 

 

창문 앞에서 야구 방망이질을 하는 아이들을 나무랐더니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 바퀴를 펑크 내 놓았다. 얼굴이 비슷비슷하여 이 아이가 저 아이 같으니 찾을 수가 없다. 벌떼인 줄 모르고 벌집을 쑤셨다며 오히려 이웃들이 웃었다.

“제1의 노인이 무섭다고 그리오.”

‘된장녀’, ‘개똥녀’, ‘쩍벌남’ 같은 우수 작품들을 쏟아내더니 최근에는 속 ‘OK 목장의 결투’를 시리즈로 내놓고 있다. 호랑이가 없는 산중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더니 우리 사회에서 무서웠던 어른이란 존재가 멸종 위기로 내몰린 것인가?

어린이를 예쁘다고 쓰다듬던 할머니가 딸 같은 여성에게 페트병으로 두들겨 맞았다느니, 자리 때문에 할머니와 어린 여학생이 맞붙었다더니, 얼마 전에는 다리를 꼬고 앉은 젊은이를 나무라다가 험한 꼴 보는 노인네의 어정쩡한 표정도 소개되었다. 노인은 소설 분량의 욕을 먹었어도 잠자코 감내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귀가 어두웠을 것이다. 아니다, 두려워 못 들은 척했을 것이다. 맞짱을 요구하는 젊은이의 대담성과 용맹스러움이 너무나 전위적前衛的이어서 정글의 법칙을 실감하였다.

‘맞짱’이란 말은 점잖지 못한 말이다. 옛날 뒷골목 주먹패들이나 입에 담았을 속어가 슬그머니 자연스러운 보통어로 자리매김해 버렸다. 굳이 풀이한다면 일대일로 맞붙어 싸우는 상대라는 뜻일 것이며, 그 전제는 남녀노소도, 위아래도 없는 자유개방형 싸움일 것이다. 한때는 나라의 최고 어른인 대통령까지 나서서 계급장 떼고 맞짱 토론을 벌여보자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었다. 맞짱은 어쩐지 막장 같은 느낌이어서 갈 데까지 가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제2, 제3, 제4의 노인도 무섭다고 그리오.”

여남은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굴뚝 연기가 피어오른다. 개중에는 짧은 교복 치마를 입은 학생도 몇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것들을 따끔하게 훈계하지 않는다면 이게 무슨 어른 꼴이냐 싶어 한 번쯤은 불호령을 내릴 태세를 갖춰 본다. 그러나 내 보란 듯 고개를 쳐들고 연기를 내뿜는 모습이 너무 공격적이어서 엄두를 못 낸다. 입은 들썩거리지만, 다리가 먼저 떨린다.

“민망하거든 보지를 마라.”라는 시위를 한다. 따가운 눈총이다.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들도 이보다 더 살벌하고 고압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길은 외길, 정면 돌파밖에는 선택이 없다.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걷는 어른들의 모습도 잘 길들여 간다. 못 볼 것은 절대로 보지 않겠다는 서약이라도 한 것 같다. 혼자 구시렁거리는 것은 불만의 토로가 아니라 이상李霜 시인의 오감도烏瞰圖를 패러디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5의, 제6의 그리고 제13의 노인도 무섭다고 그리오.”

원인原因은 먼 곳의 원인遠因이 아니라 가까운 데 있는 것 같다. 종전의 ‘님’이나 ‘씨’라는 존댓말이 점점 영어의 ‘You’에 밀려나기 시작한 때부터 예견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처음에는 가까운 연일들 사이에 ‘You’라는 애칭으로 간지러운 대화가 오가더니 어느덧 ‘You’는 나를 제외한 모든 2인칭의 호칭으로 변해버렸다. ‘당신’이란 호칭이 ‘나이 파괴’ ‘성별 파괴’를 주도하게 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전철 속 할아버지도 젊은이로부터 ‘당신’이란 호칭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미확인 사항은 단연 압권으로 등장한 동영상 속의 주인공이 집에서도 자기 부모나 할아버지에게 ‘당신’으로 부르고 있는지 여부다. 아마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길은 막다른 골목길이라고 말함이 적당適當하오.”

제 부모도, 제 선생님도 못 가르쳐 내는 일을 무슨 수로 낯선 노인이 ‘당신’이란 입장에서 훈계해 낸다는 말인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이웃이 아니라 싸워 이겨내야 할 대상이 되었으니 힘이 없으면 바른 소리도 제대로 못 할 세상이다. 옛날 어른들이 긴 담뱃대나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이유는 일종의 권위 표식이기도 했다. 이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학교 체육 선생님이나 선도善導나 규율부보다 더 무서웠다. 예의범절에서 수가 틀리면 순식간에 번개가 치고, 머리에 혹이 불어나지 않았던가. 그냥 나이 하나를 끗발로 알고 목소리를 높이고 흰머리나 담뱃대를 들이대었으니, 어른은 아이들 꾸중하는 맛으로 더욱 어른다워 보이고 아이는 잠자코 그것을 들어주는 미덕에 뉘 집 아이인지 몰라도 잘 키웠더란 말을 들었다.

“지난 생각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나았소.”

노인들은 이 빠진 호랑이의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호신용 가스총을 차고 젊은이들 앞에 나설 일이 되지 못할 것이다. 맹수에게 틀니를 심어 놓는다고 무림의 고수로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 세월이지 않은가.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몇 천 년 전의 이집트 고분 벽화에 쓰인 상형문자에서도 “요즈음 젊은것들 형편없다.”라고 씌어 있더라는 것이다. 어른들 눈에 젊은이가 온당치 않았던 일이 어제오늘만의 일이던가?

“13인의 노인은 도로道路로 질주疾走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현대수필》(2012) 신인상 등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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