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말을타고(2012)

남자의 눈물

온달 (Full Moon) 2015. 4. 16. 08:57

남자의 눈물 

 

석현수 

 

 

머리에 있던 것이 가슴에 내려오기까지 한평생이 걸렸다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과는 달리 가슴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눈물’이다. 눈물 또한 가슴에서 눈으로 올라가는 데 한평생이 걸리는 것이 아닐는지?

조선의 명문장 심노숭은 자식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눈에서 눈물이 나온다면 눈 뒤에는 커다란 눈물주머니가 있어야 하겠지만, 눈물주머니가 보이지 않구나. 가슴에 슬픔이 작용하여 눈물이 위로 올라온 것이라면 이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아니하니 무릇 물이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이지 않았던가?”라고 했다.

선비가 식견이 짧아 이런 넋두리를 했다고 보지 않는다. 눈물을 감추려 애썼더니만 큰 슬픔 앞에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겸연쩍어 둘러댔을 것이다. 울음을 울기엔 선비라는 체면이 너무 부담스러웠음을 누가 모르랴.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장부의 마음이 문장 속에 절절하다. 목 놓아 울지도 못하고 붓을 잡고 눈물에 대해 논설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나는 눈물을 자주 흘린다. 옛 기준에 의한다면 칠칠치 못한 칠뜨기 같은 존재임이 틀림없다. 이는 내 가슴과 눈이 너무 거리가 가까워 와락 눈물이 쏟아지거나, 아니면 아예 가슴 한쪽에 눈물샘을 달고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관에서 울고, 드라마 보면서 TV 앞에서 울고, 때론 책을 읽다가 눈물을 쏟기도 한다. 비극이 우리의 심상을 정화하는 기능을 한다며 희극을 멀리한 아리스토텔레스라면 반길 위인이 나다.

전쟁영화에서까지 울 거리를 찾아낸다. 줄거리 자막만 읽고서도 영화 시작부터 훌쩍거린다. 생각이 서로 달라 형과 아우가 남북으로 갈라져 싸워야 하는 한국전쟁의 이야기는 어찌 이것이 남의 일일 수 있을 것인가? 많이 울어야 마음도 홀가분하고 돈 들인 보람을 느낀다. 요즈음 세상에 선비도 없고 양반도 없어 눈치 볼 것도 없는데 굳이 숨어서 훌쩍거릴 이유가 무엇이람. 한 시대만 일찍 태어났더라도 남자 축에도 들지 못할 사람이 되레 큰소리쳐 본다.

그렇다고 내가 눈물이 헤픈 사람은 결코 아니다. 헤프다는 것은 어린이들에게나 해당할 가벼운 행동이지 않는가?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대도 바르지 못하다. 흘릴 것이 많아서 쏟아내는 것은 신진대사의 한 형태이거나 생리현상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가슴에서 눈으로 올라가는 데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는 보통의 남자에 비해 내 것은 거리가 짧고 속도가 순간적이며 운행횟수도 많은 KTX 형 사나이 눈물이라는 표현이 어떨까 싶다.

울어야 할 횟수란 슬픈 횟수만큼이어야 하거늘 어찌하여 남자는 세 번만 울음을 허락을 받고 있는 걸까? 그나마 태어나면서 얼떨결에 한 번을 써 버렸고, 부모님 멀리 떠나보내며 다시 한 번 더 울어버렸으니 내가 쓸 카드란 나라를 잃어야 흘린다는 마지막 눈물밖에 없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길이 보전해야 할 나라에서 마지막 눈물이란 영영 없어야 좋을 것이 아닌가.

나는 눈물을 자주 흘리는 사람이다. 사내라는 이유로 굳이 눈물을 보이지 말라면 앞으로는 마른 울음으로 울어야 할 것인즉 이 또한 얼마나 큰 고통이 될까. 참다 보면 행여 3,000년에 한 번 핀다는 전설의 ‘우담바라’ 같은 눈물꽃이 눈에 필까 두렵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눈물이 절반이다.”

- 김현승의 시 <아버지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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