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살핀 클래식
석현수
음악은 눈으로 보고,
미술은 귀로 듣는 엉터리다. 음악회에서는 연주자의 맵시나 감상하고 미술관에서는 호당 얼마라는 작가 소개에 귀가 솔깃하다. 이런 주제에도 음악회나 미술 전시회에 발품을 팔고 다니는 것을 보면 나는 엉터리 신사임이 분명하다.
이영자 작곡가의 작품발표회가 있었다. 작곡가는 전임 이화여대 음대 교수로서 1994년 신사임당, 2010년도 한국음악상 대상을 받은 분이다. 광복 50주년 위촉 <축전 서곡>, <대한민국 찬가>, <음악인 찬가>, MBC 문화재단 위촉 작품 <개천절> 교향곡 등을 작곡한, 이 분야의 거장이시다.
유명한 분일수록 곡은 더욱 더 어려울 터이니 오늘 내 귀는 적잖은 고생을 할 것 같다. 화려한 경력과 굵직한 타이틀이 예사로운 분이 아니다. 귀를 열어도 제대로 듣지 못할 때는 바로 눈으로 임무를 전환할 터이니 눈은 단단히 깨어 있으라 일러놓았다.
팔순을 기념하는 리사이틀이라 여타의 음악회와는 처음부터 분위기가 달랐으니 얼굴만 보아도 알 만한 분들이 빼곡히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손을 닿을 만한 거리에 국무총리를 하셨던 분도 얼굴이 보인다. 원로 분의 초대 손님인 만큼 성성한 백발의 저명인사들이 대부분이다. 수필을 쓴다는 연분이 아니었다면 나 같은 사람은 감히 한 자리 할애받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작곡가는 한국전쟁이 끝난 무렵인 1955년에 23세의 나이로 첫 작품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955>를 내었으며, 이 작품으로 스승인 나운영 선생으로부터 작곡 소질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직후 돈도 되지 않고 배도 불릴 수 없는 음악이라는 것에 매달리는 학생이 되어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울로 유학의 길을 결심 했다 하니 큰 인물들은 무엇이 달라도 다른 안목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후 프랑스, 미국, 벨기에 등에서 공부하고 모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니 어느덧 팔순을 넘기고 있다. 유인물에 실어놓은 젊을 때 사진과 팔순 원로작가의 주름진 얼굴이 크게 대조를 이루었다.
눈으로 보는 음악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눈으로 본다고 해서 눈대중하거나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가 아니다. 나름대로 기준을 만든다. 연주자가 가진 악기의 모양새(특히 하프 같은 것은 악기가 흔치 않아서 시선을 끌 만하다)에 눈길이 가며 연주자의 몰아의 경지에 후한 박수를 보낸다. 바이올린 활이 얼마만큼 맹렬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는지, 피아노라면 건반에서 손놀림이 얼마나 잽싼지 등이 될 것이다. 의상도 빠질 수 없는 한 부분이어서 하늘하늘한 롱드레스나 점잖게 발산하는 관능미에는 점수를 많이 준다. 이런 정도의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음악과 연극을 넘나드는 퓨전 예술이라도 보러 온 사람 같지 않은가?
특별히 이번에는 작곡가의 두 자제분이 연주한다고 했다. 음악 감상의 포인트는 자연적으로 원로 작곡가의 자제분 찾기가 되겠다. 대성한 음악가 집안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다. 유인물을 얼핏 살피니 우연하게도 ‘이’, ‘박’, ‘한’ 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각 둘씩이다. 자제분이라고만 했기에 두 사람이 자매인지 남매인지는 모른다.
첫 시작 곡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955>부터 나를 깊은 산중으로 데려다 놓아 헤매게 했다. 귀에 맡겼더라면 아마도 깊은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피아노의 이○○, 첼로의 이△△ 두 분의 연주를 보며 이영자 교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 저래서 신사임당 상을 받으셨구나 싶었다. 갸름한 얼굴과 눈매가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고 생각했다. 첫 단추가 잘못 채워지는 순간이다. 작곡자가 이영자인데 어떻게 자녀가 어머니와 같은 ‘이’ 씨 성일 수 있느냐는 생각이 들자 이건 아니다 싶었다. 다음은 바이올린의 박○○, 소프라노의 박△△일 거라는 추측을 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박 씨 성의 두 사람이 작곡가를 더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툰 눈썰미가 줏대 없이 오락가락한다. 작곡가의 부군夫君 성씨도 모르면서 ‘이’ 씨, ‘박’ 씨를 넘나드는 꼴이 마치도 친자확인을 하려 드는 돌팔이 의사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이러한 궁금증은 음악회가 끝난 뒤에도 풀리지 않았다. 열쇠는 뜻밖에도 하프 연주자 한준영 선생의 프로필 속에 있었다. 이영자 교수의 막내딸이라는 소개가 문장 속에 있었던 것이다. 작은 글씨를 잘 읽어 보라는 말은 계약서에서나 필요한 말이 아니었다. 한준영 씨가 막내라면 피아노의 한난이 연주자는 자연스럽게 언니임이 밝혀진 셈이다. 연주회의 마지막 피날레가 왜 한준영, 한난이 선생 이였는지 짐작이 갔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 주제에 의한 하프와 피아노를 위한 환상적 변주곡〉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나왔던 이유도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작곡자는 오선지위에다 음악기호로써 감정을 표시한다. 나타내고자 하는 뜻은 몇 달, 때론 몇 년을 걸쳐 어려운 기호로 담아내는 것이 작곡이다. 이렇게 귀한 작품도 나 같은 형광등을 만나면 빛이 나지 않는다. 아쉽게도 내게는 음악을 향해 열린 귀가 없다. 쉽게 귀가 열리고 재미가 있었으면 하는 것 자체가 음악에 대한 나의 몰이해가 아닐까 싶다.
작곡가는 음악의 여기餘技로 수필을 쓰고 있다. 수필을 오선지에 옮겨 놓은 작곡가는 세계적으로 이분이 처음이다. 운정의 수필 ‘구름카페’라는 노래였다. 지금의 열의로 보면 오선지가 아닌 원고지위에다 자신의 음악 세계를 옮겨 적을 날도 멀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분의 글을 가장 먼저 반겨 읽을 독자는 음악의 귀가 열리지 못해 눈으로 클래식을 대해야 했던 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