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美世麗尼(2018)

정(情)은 선불이다

온달 (Full Moon) 2018. 2. 21. 09:15




정(情)은 선불이다

 

 

필자는 대구고등학교 6회 졸업생이다. 고교 동창이라는 전제가 있으면 모르는 사이라도 몇 회라는 말 한마디로 이내 말을 튼다. 이런 데 익숙하지 못하면 삽시간에 거만한 놈이 되어버린다. 난데없이 6회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다. “현수야 너 참 오랜만이다.” 나는 덜 친한 사이로 오해를 받기 싫어 재빨리 응답을 보냈다. “그래 오랜만이야 너도 잘 있었어?” 졸업생이 많아 한 반이 아니면 목소리만으로는 정말 아슴아슴하다. 전혀 생각이 나지 않을 때이니 호들갑이 더 심해진다. 이놈이 벌써 나를 잊었냐는 핀잔을 듣기 싫어서다.

 

6기생을 6회생으로 잘못 들어 버렸던 것이다. 도무지 누구인지 기억이 없다. 6회로 잘못 듣고 얼른 오두방정을 떨었지만 뒤가 이상했다. 말을 이어가기가 곤란할 정도로 답답함을 느꼈다. 상대 쪽의 첫 숨 고르기가 이루어질 무렵 내 쪽에서 백기를 들었다. 누구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상대 쪽은 계속 6기라면서 말을 아꼈으며 다소 실망하는 모습이었다. ‘회’와 ‘기’가 충돌이 자꾸 나고 있었다.

 

6회가 아니라 6기였구나.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지사의 전화를 잘못 받은 소방관이 이랬을까? ‘회’와 ‘기’가 잘못 혼돈되면 남자로서는 사망 일보 직전에 다다를 수 있다. 전화 거는 쪽은 나의 12년 위의 선배님이셨다. 1년만 위여도 자다가 경기를 일으키는 조직이니, 한마디로 말해 태산 같은 어른이다. 얼른 가던 길을 멈추고 담벼락에 붙어 차렷 자세로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추~웅~성!” 내 쪽의 불찰을 얼른 사과드렸다. 연말연시 동창 모임이 있어 6회 동기들끼리 전화가 많이 오고 가다 보니 6기라는 말씀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음을 아뢰었다.

 

‘회’와 ‘기’는 엄청난 차이다.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은 여전했다. 30년 만의 통화였지만 갑자기 불어 닥친 밀리터리 한파에 흐트러져있던 정신이 번쩍 차려졌다. 생각 밖이다. 건망증이니 뭐니 하더니만 혼이 나고 보니 30년을 뛰어넘어 신기하게도 목소리와 얼굴이 뚜렷해졌다. 지금은 세상일 다 내려놓고 편히 쉬고 계셔야 할 연세인데, 웬일일까 싶었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다. 남도의 봄기운 같은 마음을 불어넣어 주었다. 여든을 넘긴 연세에 새까만 후배 기수인 나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전화했단다. 연락할 방법이 없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야 전화번호를 알 수 있었노라고 했다. 당신의 기억 속에 몇몇 남아있지 않는 후배, 그중의 하나가 나였다고 하니 얼마나 황공스러운 일인가. 말씀이 마무리될 즈음 사모님의 안부를 올렸다. 울타리 없는 사택 위아래에 살면서 우리 가족에게 고맙게 해 주던 분이 아니었던가. 세상 뜬 지가 다섯 해가 넘었다고 했다. 약 좋은 시절에 일흔다섯이야 노환이라 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젊을 때는 살기 바빠 짬을 못 내고, 나이 들어서는 내 늙기에 바빠 다른 이들을 만나지 못하는 시기가 일흔이고 여든이다. 앉아서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이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옮긴 경우다. 윗분은 오늘 큰 것 하나를 가르쳐 주신 셈이다. 갈수록 아는 것이 넘쳐나지만, 소식을 아래쪽으로 먼저 물어줄 줄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꼭 그대로 흉내 내고자 함은 아니지만, 선배의 심정으로 후배에게 똑같은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6기 선배도 이런 마음이었겠지. 12기수 아래에서 보고 싶은 한 사람을 골랐다. 그냥 보고 싶어 전화했다며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다. 내일 어떠냐고 했더니 갑작스러웠던지 난감해했다. 주말을 제안했으나 그때는 친구 딸 결혼식에 간다며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맞아, 벌써 자녀를 결혼시키는 나이들이겠지. 후배 또한 퇴직한 지 오래 되었으니.

 

‘저도 보고 싶었어요.’ 12년 후배 기수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통화도 짧았다. 그는 아직 내 나이가 아니지 않은가. 아마도 아직은 젊다 보니 미완성의 일들이 많이 있겠지. 쉽게 건너지는 강이 아니었다.

 

나이 들면 정은 선불이어야 한다. 주지 못한 것은 받을 자격이 없다. 통화 명부에 남아있는 기록을 찾아 윗분의 전화번호를 다시 눌렀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여든 노인에게 황급히 올렸다. “이번 주말 점심 한번 하실 수 있을는지요?” 한 트럭이 넘을 분량의 행복 바이러스가 선배님 쪽에서 전파를 타고 내 쪽으로 흘러들어왔다. 얼마나 고맙고 생경해 하셨는지 모른다. 감기 기운이 떨어지면 곧바로 내게 연락을 주겠노라 하셨다. 여든의 노인과 일흔 청년의 재회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著書 > 美世麗尼(2018)'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주머니 시비  (0) 2018.02.21
된장녀  (0) 2018.02.21
꽃과 잡초  (0) 2018.02.21
부부(夫婦)의 날에   (0) 2018.02.21
美世麗尼 miscellany Ⅱ  (0) 2018.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