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주관산문(2022)

윤오영의 양잠설과 곶감론

온달 (Full Moon) 2022. 5. 3. 14:24

 

윤오영의 양잠설과 곶감론

 

 

양잠설養蠶說

-윤오영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었다. 달은 훤히 밝은데, 어디서 비오는 소리가 들린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 방에서 누에가 풀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누에가 어석어석 다투어서 뽕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었다. 이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 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며 엿 빛을 띠게 된다. 그때부터 식욕이 감퇴된다. 이것을 최안기(催眼期)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식을 해버린다. 그러고는 실을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누에가 한잠 잔다고 한다. 얼마 후에 탈피를 하고 고개를 든다. 이것을 기잠(起蠶)이라고 한다. 이때에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특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

 다시 뽕을 먹기 시작한다. 초잠 때와 같다.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해서 최안, 탈피, 기잠이 된다. 이것을 일령 이령(一齡二齡) 혹은 한잠 두잠 잤다고 한다.

오령이 되면 집을 짓고 집 속에 들어앉는다. 성가(成家)된 것을 고치라고 한다. 이것이 공판장(共販場)에 가서 특등, 일등, 이등, 삼등, 등외품으로 평가된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사람이 글을 쓰는 것과 꼭 같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대개 한 때는 문학소년 시절을 거친다. 이때가 가장 독서열이 왕성하다. 모든 것이 청신(淸新)하게 머리에 들어온다. 이때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 그의 포부는 부풀 대로 부풀고 재주는 빛날 대로 빛난다. 이때 우수한 작문들을 쓴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그는 사색에 잠기고 회의에 잠긴다. 문학 서적에서 조차 그렇게 청신한 맛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혹은 현실에 눈떠서 제 각각 제 길을 찾아가기도 하고 철학이나 종교서적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직 침울(沈鬱)한 사색에 잠긴다. 최안기에 들어선 것이다.

한잠 자고 나서 고개를 들 때, 구각(舊殼)을 벗는다. 탈피다. 한 단계 높아진 것이다. 인생을 탐구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정신적으론 극도의 쇠약기다. 그의 작품은 오직 반항과 고민과 기피에 몸부림친다. 이때를 넘기지 못하고 그 벽을 뚫지 못하고 대결하다 부서진 사람들이 있다. 혹은 그를 요사(夭死)한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글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전에 읽었던 글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 이제 이령(二齡)에 들어선 것이다. 몇 번이고 이 고비를 거듭하는 속에 탈피에 탈피를 거듭하며 자기를 완성해 간다. 그 도중에는 무수한 타락자들이 생긴다. 최후에, 자기의 모든 역량을 뭉치고, 글 때를 벗고, 자기대로의 세계에 안주한다. 누에가 고치를 짓고 들어앉듯 성가(成家)한 작가다. 비로소 그의 작품이 그 대소에 따라 일등품, 이등 품으로 후세에 평가의 대상이 된다.

 

 대개 사람의 일생을 육십을 일기(日期)로 한다면 이십대가 일령기요, 삼십대가 이령기요, 사십대가 삼령기요, 오십대가 사령기요, 육십대가 되면 이미 오령기다. 이제는 크든 작든 고치를 짓고 자기 세계에 안주할 때다. 이때에 비로소 고치에서 명주실은 풀리기 시작한다. 자기가 뽕을 먹고 삭이니만치 자기가 부단히 고무되고 고초하고 탈피해 가면 지어 놓은 고치[경지]만큼, 실을 뽑는 것이다. 칠십이든 구십이든 가는 날까지 확고한 자기의 경지에서 자기의 글을 쓰고 자기의 말을 하다가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십대∼육십대로 예를 들어 말한 것은 육체적인 연령을 말한 것은 물론 아니다. 육체적인 연령에 대비해 보는 것이 알기 쉽기 때문이다. 우수한 문학가는 생활의 농도와 정력의 신비가 일반을 초월한다. 그런 까닭에 이 연령은 천차만별로 단축된다. 우리는 남의 글을 읽으며 다음과 같이 논평하는 수가 가끔 있다.

 

"그 사람 재주는 비상한데, 밑천이 없어서.

" 뽕을 덜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의 부족을 말함이다.

"그 사람 아는 것은 많은데, 재주가 모자라.

" 잠을 덜 잤다는 말이다. 사색의 부족과 비판 정리가 안 된 것을 말한다.

"그 사람 읽기는 많이 읽었는데, 어딘가 부족해.

" 뽕을 한 번만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기가 일회에 그쳤다는 이야기다.

"학식과 재질이 다 충분한데 그릇이 작아."

사령(四齡)까지 가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 사람 아직 글 때를 못 벗은 것 같애.

" 오령기(五齡期)를 못 채웠다는 말이다. 자기를 세우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 참 꾸준한 노력이야, 대 원로지.

그런데 별 수 없을 것 같아." 병든 누에다. 집 못 짓는 쭈구렁 밤송이다.

"그 사람이야 대가(大家)지, 훌륭한 문장인데, 경지가 높지 못해."

고치를 못 지었다는 말이다. 일가(一家)를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양잠가에게서 문장론을 배웠다.

 

자료출처: 윤오영 『곶감과 수필』(서울: 태학사 2000) p. 211

 

 

 

곶감과 수필

윤오영

 

 

 소설을 밤(栗)에, 시를 복숭아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곶감(乾柿)에 비유될 것이다. 밤나무에는 못 먹는 쭉정이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밤나무라 하지, 쭉정나무라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보면 쭉정이도 밤이다. 복숭아에는 못 먹는 뙈기 복숭아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역시 복숭아나무라 하고 뙈기나무라고는 하지 않는다. 즉 뙈기 복숭아도 또한 복숭아다. 그러나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똑같아 보이지만 감나무에는 감이 열리고 고욤나무에는 고욤이 열린다. 고욤과 감은 별개다.

 

 소설이나 시는 잘 못 되어도 그 형태로 보아 소설이요 시지 다른 문학의 형태일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 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수필이 잘 되면 문학이요, 잘 못되면 잡문이란 말은 그 성격을 구별 못 한 데서 온 말이다. 아무리 글이 유창하고 재미있고 미려해도 문학적 정서에서 출발하지 아니한 것은 잡문이다. 이 말이 거슬리게 들린다면 문장 혹은 일반 수필이라고 해도 좋다. 어떻든 문학작품은 아니다.

 

 밤(栗)은 복잡한 가시로 송이를 이루고 있다. 그 속에 껍질이 있고, 또 보늬가 있고 나서 알맹이가 있다. 소설은 복잡한 이야기와 다양한 변화 속에 주제가 들어있다. 복숭아는 살이다. 이 살 자체가 천년반도(千年蟠桃)의 신화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형태를 이루고 있다. 시는 시어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로 조성되어 있다.

 

 그러면 곶감은 어떠한가. 감나무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 푸른 열매가. 그러나 그 푸른 열매는 풋감이 아니다. 늦은 가을 풍상을 겪어 모든 나무에 낙엽이 질 때, 푸른 하늘 찬 서리 바람에 비로소 붉게 익은 감을 본다. 감은 아름답다. 이것이 문장이다. 문장은 원래 문채(文采)란 뜻이니 청적색이 문(文)이요 적백색이 장(章)이다. 그 글의 찬란하고 화려함을 말함이다.

 

 그러나 감이 곧 곶감은 아니다. 그 고운 껍질을 벗겨야 한다. 문장기(氣)를 벗겨야 참 글이 된다는 원중랑의 말이 옳다. 그 껍질을 벗겨서 시득시득하게 말려야 한다. 여러 번 손질을 해야 한다. 그러면 속에 있던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하얀 시설(柹雪)이 앉는다. 만일 덜 익었거나 상했으면 시설은 앉지 않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에 혹은 납작하게 혹은 네모지게 혹은 타원형으로 매만져 놓는다. 이것을 '곶감을 접는다'고 한다. 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곶감이라야 오래 간다.

 

 수필은 이렇게 해서 만든 곶감이다. 곶감의 시설(柹雪)은 수필의 생명과도 같은 수필 특유의 것이다. 곶감을 접는다는 것은 수필에 있어서 스타일이 될 것이다. 즉 그 수필, 그 수필마다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면 곶감의 시설(柹雪)은 무엇인가. 이른바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가 아닐까. 이 이미지를 나타내는 신비가 수필을 둘러싸고 있는 놀과 같은 무드다. 수필의 묘는 문제를 제기하되 소설적 테마가 아니요, 감정을 나타내되 시적 이미지가 아니요, 놀과도 같이 아련한 무드에 쌓인 신비로운 정서에 있는 것이다.

 

자료출처: 윤오영 『곶감과 수필』(서울: 태학사 2000) p. 215

 

 

윤오영의 두 작품 양잠설과 곶감과 수필은 수필이라는 문학 갈래의 특성을 비유적 표현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양잠설에서는 윤오영 작가가 생각하는 좋은 문장이란 다른 사람의 글을 많이 읽고 그것이 글쓴이의 판단과 사색으로 소화된 문장일 것이다. 잘 지어진 고치가 공판장에 나가 최고의 상품이 되듯 좋은 작품이라야 독자로부터 환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강조하고 있다. 글쓰기 과정을 어렵지 않게 누에치기에 비유하여 설명함으로서 재미를 곁들인 수필이론을 썼다. 곶감과 수필에서는 수필이 형태가 명확한 소설이나 시와 달리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아 종종 잡문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수필의 특성을 밤과 쭉정이, 복숭아와 뙈기 복숭아, 감과 고욤의 관계를 통해 정리하고 있다. 또한 감이 익은 뒤 이를 손질하여 곶감을 만드는 과정에 빗대어 수필도 작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를 가지는 정서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